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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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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만화 === * [[이태준(소설가)|이태준]]의 기행문 <소련기행>에서 1946년 9월 스탈린그라드를 방문했던 대목이 있다. 참혹한 도시의 잔해, 복구작업에 동원된 독일군 포로들을 보고, 시 도시계획기사의 복구 계획 설명을 듣고, [[야코프 파블로프|파블로프]] 군조관(軍曹館, Дом Павлова)과 마마이 언덕[* 이때도 아직 탄피와 철모가 무수히 나뒹굴고 피 묻은 군복 자락이 나부끼고 있었다고 한다.], 재건된 제르진스키 트랙터 공장 등을 답사했다. *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군이 소련군을 흑해의 바쿠 유전지대와 분리해 석유 공급을 차단하여 승리한다. * [[용사가 돌아왔다]]에서는 소련군 소속 빙결의 용사 [[아이반 푸쉬킨]]이 혼자서 나치 독일 소속인 골렘의 용사 요나스와 검의 용사 지그프리드를 쓰러뜨렸다. *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 [[전투조류]]의 후일담에서 [[루돌 폰 슈트로하임]]이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TVA에서는 전사 직전 마지막 활약이 영상화되었다. * 대체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1940년 여름에 <청색 작전>이 발동되어 1940년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치렀다. 본작에서는 1939년 6월 25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기 때문.[* 본작 [[진주만 공습]]도 우연히 같은 날에 일어나 미국이 독일과 일본이 짜고 미국을 공격했다고 오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1939년 겨울부터 1940년 봄, 소련이 [[모스크바 전투]]의 방어에 성공하자 1940년 봄에 영국의 [[디에프 상륙 작전]]과 소련의 <춘계 공세>를 동시에 개시했지만 둘 다 실패했다. 또 1940년 여름 [[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역]]의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를 거의 포기하고 중국 전선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면서 절대국방선을 대만-사이판-이오지마-오키나와로 축소하였다.[* 이 때문에 본작 1942년 미군은 일본 본토 공격 루트를 대만-한반도 노선으로 바꾸었다. 본작 일본군이 [[대륙타통작전]] 대신 <등애 작전>을 펼친 것도 원인이었다.] 소련 군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막 일어나는 상황에서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북상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스탈린에게 이러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스탈린은 걱정 안 해도 되니 시베리아 주둔군을 대대적으로 빼라고 지시했다. 왜냐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 티토를 연합군에 포섭하기 위해 직접 찾아간 [[유진 킴]]이 슈코르체니의 유고 파르티잔 참수 작전을 피해 도망치다 거짓 작전이었던 <젤리그나이트 작전>의 자료를 입수해 이를 믿어버린 히틀러가 동부전선에서 100만이 넘는 병력을 이탈리아와 유고에 투입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에 상륙해 북상한다는 거짓 작전으로, 티토와의 협상이 잘 안 되면 약 팔려고 만든 거짓 작전이었지만 티토와 협상이 잘 되어서 찌라시로 남겨놓았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1939년 12월 26일 유진 킴의 개입으로 이미 종결되었지만, 스탈린은 동부전선에서 더 이상 모스크바를 함락시킬 추축군 규모는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 계획대로 1941년 프랑스에 미영 연합군이 상륙해 서부전선을 개막할 때까지 버티면 된다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설령 일본군이 진짜 시베리아로 쳐들어오더라도 모스크바와의 거리가 워낙 먼 만큼 독일 손 본 다음에 일본군 손보면 된다고.[* 시베리아 유전 개발은 1950년대라서 이때까지 시베리아는 진짜 [[블라디보스토크]]밖에 가치가 없던 곳이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8월에 개시되어 9월부터 본격화되었으며,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주도했다. 라이헤나우는 가장 극렬한 친나치 인사이자 육군 내 평판이 처참한 자였지만, 원수봉을 쥘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라이헤나우는 킬딸을 중시하는 독일군답게 스탈린그라드 자체에는 크게 구애되지 않았지만, 참모들은 라이헤나우가 히틀러에게 딸랑거린다고 SS와 함께 학살에 정신이 팔려 진격이 늦어진다고 속으로 깠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태평양 전역을 대부분 포기하고 중국 전선에 집중하여 [[대륙타통작전]] 대신 [[검각]]을 넘어 [[충칭]]을 함락시킨다는 <등애 작전>을 채택하고 세부 작전 수립에 돌입하였다. 1940년 10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그 유명한 7초 사망을 찍으며 참극을 찍었고 [[과달카날 전역]]도 이때 마무리되었다. 11월, 미군은 한창 어뢰 스캔들에 시달렸고 육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준비하느라 바빠 대신 해군이 동남아시아 각지의 섬에 버려진 일본군을 폭격했다. 또 이탈리아에서는 롬멜을 상대로 몽고메리가 승리를 거둬 [[나폴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이미 북아프리카 전역의 패배로 입지가 약해졌던 롬멜은 케셀링과 자리를 바꿔 귀국해야 했다. 본작에서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움베르토 왕세자가 이탈리아 내전을 주도했는데, 이 시점에서 연합국의 뜻을 받아들여 [[움베르토 2세]]로 즉위하여 이탈리아 내전을 이어갔지만, 영국군은 노르망디 상륙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철수했다.[* 다만 이후에 알렉산더 장군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부임된 걸 보면 완전히 발을 뺀 건 아닌 듯하다.] 그리고 소련은 화성 작전과 천왕성 작전을 발동했다. 히틀러는 르제프도 스탈린그라드도 레벤스라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철수해야 한다는 군부의 뜻을 꺾었지만, 히틀러가 틀렸다. 백만에 달하는 소련군이 미제 장비 풀템을 두르고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을 쓸어버렸다.[* 본작에서는 미국의 랜드리스 보정을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 중국 물자까지 대규모로 슈킹했다고.] 특히 [[M4 셔먼]] 후기형에 90mm 주포를 장착한 M10 잭슨(본작 오리지널 전차)은 [[6호 전차 티거]]도 거침없이 날려버려 제냐(유진) 전차라 불리며 인기를 누렸고, 독일군과 조우하게 되었지만 소련군은 미국에게 받은 [[M26 퍼싱]]을 신무기로 꺼내들어 티거를 비롯한 독일군의 모든 전차를 분쇄하고 독일군의 방어선을 부수며 진격했다.[* 본작의 퍼싱은 1939년에 만들어졌지만 구동계와 엔진 문제 때문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쓰지 않았고 1940년에 문제를 해결해서 사정이 급한 소련군에 먼저 보내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데뷔했다. 따라서 말이 퍼싱이지 정황상 [[M46 패튼]]~[[M47 패튼]]급의 성능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라이헤나우는 총통을 설득할 테니 철수하라고 지시하려다 이때 뇌출혈로 쓰러지고 그대로 사망하면서 지휘체계까지 혼란이 와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파멸을 맞이했다.[* 한편 화성 작전은 발터 모델 때문에 고기분쇄기 엔딩을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황상 여기서도 <들소 작전> 엔딩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완전히 종결되지는 않았지만, 승세를 확실히 굳힌 뒤에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나무위키, title=스탈린그라드 전투, version=1484, uuid=99486f51-ce07-4344-bb2e-21d57b31f8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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